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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iquetan 라이프로그/에세이 - 다시 쓰기

[에세이] 피씨방의 추억 - 나와 닮은, 너와 닮은

ㅡ [에세이] 피씨방의 추억 - 나와 닮은, 너와 닮은


  1.

  우리나라에 피씨방이 처음 생기기 시작하던 시절. 그러니까 아마 약 20여 년 전, 그때 우리 동네 피씨방 요금은 지금보다도 더 비쌌었다. 지금은 한 시간에 천 원도 안 하는 곳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 시절 우리 동네 피씨방에선 게임을 하기 위해 한 시간에 이천 원을 내야 했다.

  초등학생 둘이서 어떻게 어떻게 겨우 각 이천원씩을 마련해가지고, 피씨방 사장 아저씨에게 드린다. 그러면 그 돈을 받은 아저씨는 포스트잇에 지금 시간을 펜으로 적고,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후 시각을 펜으로 적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은 게임을 게임답게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초등학생 친구 둘이서 피씨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노라면, "지금 공격한다", "아직 준비 안 됐어 쫌만 기다려" 하며 공격을 서로 미루다, 20세기 끝 무렵의 이천 원으로 산 한 시간을 보내버리곤 했다.

  그렇게 채 한 게임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선불 시간이 다 되었지만, 지금처럼 컴퓨터가 인정사정없이 꺼졌던 것은 아니다. 사용이 끝날 때가 넘어서면, 피씨방 사장 아저씨가 우리 등 뒤로 슬며시 오셔서, '시간 다 되었으니 이제 나오라'고 알려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제발 승부는 보게 해달라며 간청을 했다. 아저씨는 빈자리를 기다리는 손님이 있는지를 확인해, 여유가 있다면 처음이자 마지막 공격을 하도록 해주었다. 대기 중인 손님이 있는 경우에는, 아저씨가 우리의 진영을 슬쩍 보고서 누가 이겼다며 판정을 해주었다. 어떻게 보면 e스포츠 최초의 심판인 셈이다. 피씨방 상황에 따라 한 시간을 칼같이 지키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테니, 인정이 굉장히 많은 심판이었을지도.


  2.

  한 시간의 짧고도 긴 승부를 뒤로하고, 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이 자리 저 자리를 구경하며 기웃거렸다. 피씨방을 가거나 오락실을 가면 뒤에서 뚫어져라 보고 있는 초딩들. 그게 우리의 과거 모습 그대로다. 그나마도 이제는 그런 아이들도 잘 없는 것 같다.

  그날 내가 구경하던 자리의 아저씨는 처음 보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게임의 이름은 리니지였다. 글자가 떠다니고 화면이 번쩍이는 그 게임을 구경하고 있는데, 피씨방 문이 소란스레 열리며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들어왔다. 그 아저씨는 성을 내며 "달빛요정"을 찾았다.

  달빛요정이라는 말을 듣자 어떤 기억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내가 구경하고 있던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 아저씨가 했던 말이 "네가 사랑의천사냐?"였다. "달빛요정"과 "사랑의천사"간의 현피였다. 이른바 현피라 불리는 개념이 생기던 시기도 그 시기다.

  사실 이 로맨틱한 현피 이야기는,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다. 당시 떠돌던 통신가 유머였는데, 현실에선 아저씨들이 게임 속에서는 요정이고 천사였다는 우스갯소리였다. 재미를 위해 내가 겪은 것처럼 썼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고백한다.

  이 유머를 접하고 나서부터 나는 게임을 할 때 반드시 남자 캐릭터만을 골랐다. 혹시나 게임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을 실제로 만나게 되었을 때 창피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달빛요정 아저씨의 경우처럼, 나와 전혀 다른 모습의 캐릭터는 피하게 된 것이다.


  3. 

  시간은 흘러, 캐릭터의 성별을 구분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조악하던 게임 그래픽도 옛말이 되었다. 그래픽이 발전하는 사이, 나는 게임을 쉬기도 했고, 캐릭터를 고르는 게임을 하지 않기도 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갔고, 외박을 나와 선임과 피씨방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 선임이 하는 것을 따라 하게 되어 접한 게임이 아이온이었다. 아이온은 대단한 게임이었다. 정해진 캐릭터의 모습 몇 개 중 하나를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모습의 캐릭터를 자유롭게 만들 수가 있었다.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나는 내 캐릭터의 외향을 당시 존경했던 어느 60대 남성 유명인의 모습을 따서 만들어냈다. 그 캐릭터는 굉장히 그럴싸하게 만들어져서, 그 모습에 나도 놀라고 내 선임도 놀랐었다.

  우리는 낄낄거리며 그 캐릭터로 냅다 사냥을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을 플레이하다가, 문득 내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지만, 60대 남성의 뒤통수를 몇 시간이나 보고 있자니, 부담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옷을 얻어도, 새로운 아이템을 얻어도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레벨업 할수록 캐릭터가 멋있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인데, 통통한 60대 남성이 무슨 옷을 입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 게임이 그렇게 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다음에 게임을 한다면 반드시 보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골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4. 

  그로부터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온 때도 대단했지만,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새 게임의 캐릭터는 정말 실제 사람과 비슷했다. 놀라울 정도의 그래픽을 가진 게임에 큰 흥미를 보이고, 대단한 관심을 보였지만, 나는 결국 그 게임을 플레이하지 못했다.

  훌륭한 그래픽만큼이나 더 높은 사양의 컴퓨터를 요구하던 그 게임을 하기 위해, 나는 피씨방에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그 게임을 실행했고, 게임을 본격적으로 플레이하기 위해 캐릭터를 만들었다.

  군대 시절의 기억을 잊지 않고, 이번에는 여성 캐릭터를 선택했다. 그리고는 캐릭터의 외형을 세부적으로 조정하는 화면으로 넘어왔는데, 나는 여기서 너무나도 놀랐다. 아무것도 조정하지 않은 캐릭터의 기본값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여자와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담배 연기와 캐릭터들의 비명으로 가득한, 고작 이따위 피씨방에 와서 이런 센치함이라니. 나는 그 길로 피씨방을 나왔다.

  그 캐릭터는 당연히 그녀가 아니었다. 단순히 껍데기가 조금, 아니 많이 비슷했을 뿐. 그렇지만 나는 그 캐릭터를 보길 피해버리고 말았다.

  그 후 몇 번인가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잘 지내냐고. 잘 지낸다고. 하지만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게임 속에서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도 잘 지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