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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siquetan 보듣만고생/그리고생각한것들

오늘, 88 서울 올림픽 개최

 ㅡ오늘, 88 서울 올림픽 개최

 

1988년의 오늘, 9월 17일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독자님들 중에도 호돌이랑 동갑이신 분들 있겠죠? 이제는 그들도 서른이라는 나이를 앞두고 있는 만큼 더 이상 본인이 호돌이랑 동갑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호돌이는 88 서울 올림픽의 마스코트입니다. 그리고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 88 서울 올림픽이 1988년 9월 17일 개최되었죠.

 

서울 올림픽은 1988년 9월 17일부터 동년 10월 2일까지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으로, 정식 명칭은 제 24회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 (Game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입니다.

 

 

 

 

당시 올림픽 유치는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경쟁 도시인 일본의 나고야는 일찌감치 1977년부터 올림픽 유치 준비했고, 한국은 아시안 게임 개최 경험마저도 없어 서울은 승산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1986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후 2000년 올림픽을 노리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그러나 노신영 당시 외무부 장관 등은 대륙 안배원칙을 고려할 때 88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다시 아시아에서 올림픽이 열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 보았고, 또한 21세기에는 중국이 부상할 것을 예상해 지금이 아니면 오히려 더 힘들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적인 여건은 어쩔 수 없었는지 한국은 일본에 빅딜을 제안하게 되는데요. 86 아시안 게임은 서울에서 개최하고, 88 올림픽은 일본 나고야가 개최하도록 서로 밀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감이 충만하던 일본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지만, 오히려 대한민국은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88년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 전화위복의 쾌거를 달성하죠.

 

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 84차 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서울은, 일본의 나고야를 52대 27로 꺾고 개최지로 선정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서울이 승리한 데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서방 국가들이 급성장하고 있었던 일본을 경계하고, 한국과 사정이 비슷한 제3세계 국가들이 서울을  지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일본의 표밭으로 예상되던 유럽이 서울을 지지하도록 마음을 돌린 데는 서울 올림픽을 지원하기로 한 아디다스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독자적 스포츠 브랜드가 많지 않은 한국에 비해, 일본은 세계적 브랜드 미즈노와 아식스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내에서나 유명한 프로스펙스정도가 있었죠. 때문에 일본이 올림픽을 개최하면 일본계 스포츠 기업들이 세계 점유율을 높일 가능성을 만들어 준다는 인식이 있었고 그를 경계한 것입니다.

 

중동지역은 1970년 중반부터 시작된 중동 건설붐을 시작으로, 1980년대 초에 이미 우리나라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여 중동 현지인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각인시킨 상태였습니다. 더불어 올림픽 유치 준비를 앞두고 일본이 쿠웨이트의 IOC진출을 반대한 것들이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도 있죠. 그것이 비교적 문화 동질성이 강한 중동의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거기에 당시 아시아에는 일본 외에는 올림픽을 개최했던 국가가 없었는데, 1964년에 하계 올림픽을, 1972년에 동계 올림픽을 치른 일본이 또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스무 살 도쿄

저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08-06-1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그해 봄, 나의 청춘은 시작되었다!” 풋풋함, 설렘, 망설임,...
가격비교

 

유치에 실패한 나고야 현지의 모습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스무살, 도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던 시골지방 나고야의 탈락에 충격을 받은 주인공과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가 드러납니다.

 

 


 

 

냉전 상황에서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서방 국가가, 1984 LA 올림픽에서는 공산 국가가 보이콧을 하는 등 올림픽은 반쪽짜리 세계인의 축제로 지속되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던 김운용 등이 러시아어까지 배워가며 소련 IOC위원을 만나 적극적으로 설득을 시도했으며, 때마침 소련에서도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과 공산 국가들이 참가를 결정했습니다. 덕분에 서울 올림픽은 총 160개 국가가 참가하고 8년만에 서방 진영과 공산 진영이 함께 한 역대 최대 규모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88 서울올림픽의 개막식(오프닝) 영상입니다.

 

 

 

지금과 비교하여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선수단이 입장할 때 그들의 소속 국가를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그 나라의 경제 규모를 설명하며, 우리보다 잘 사는 나라입니다, 우리보다 못 사는 나라입니다하며 소개하는 멘트에서 당시 우리나라가, 우리나라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피땀 흘려 경제를 일군 성과가 세계 속에 어느 정도인지, 성적표를 받아보고 싶었을까요?

 

현재는 tvN 롤러코스터 출연으로 잘 알려진 굴렁쇠 소년, 윤태웅씨의 퍼포먼스도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81년 9월 30일 서울 올림픽 개최가 결정된 날 태어나 뽑힌 소년. 당시 전쟁의 이미지만이 강했던 한국에 평화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동서 진영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이어령교수가 기획한 굴렁쇠 퍼포먼스는 서울 올림픽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윤태웅은 지금 배우로 활동 중입니다.

 

올림픽 성화 점화는 마라토너 손기정이 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너무 뻔한 캐스팅이라는 의견에 점화가 아닌 최종 성화 봉송주자로 결정되었습니다. 손기정과 관련된 일장기 말소사건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손기정옹의 모습이 가슴뭉클 하게 느껴집니다.

 

 

 

 

 

이 성화 점화는 역대 올림픽 최초로 계단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요. 서울 올림픽 때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도입한 이후 새로운 점화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올림픽의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신흥 자유진영의 대한민국에서 성공적으로 개최된 88올림픽은 공산 정권에 대한 회의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공산 국가가 와해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으로 평가됩니다. 한국이 동유럽 국가 및 공산주의 국가들과 대대적 수교를 시작한 것도 1989년부터이니 올림픽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죠. 성공적인 올림픽으로 인해 대한미국의 이미지가 달라졌고 이것이 국제 무대에서의 한국의 외교력을 높이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 올림픽 공식 주제곡인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 Hand in Hand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1,700만장의 싱글 판매고를 올렸다고 추정되며, 독일, 일본, 홍콩, 스위스, 스페인을 비롯한 17개국에서 음반 순위 1위에 랭크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집계 기록의 부정확함 때문에 이는 추정치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톰 휘틀록Tom Whitlock, 김문환 작사, 조르조 모로더Giorgio Moroder 작곡의 이곡은, 처음에는 부정적인 국내 여론이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최초의 올림픽에서 우리 음악을 세계에 알릴 기회인데 왜 외국 작곡가의 곡을 사용하냐는 것이었죠. 심지어 해외에서 활동해 국내 인지도가 크지 않던 코리아나도 교포들이 만든 3류 가수로 평가절하하는 여론도 많았습니다. 7080년대 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180년에넌 서독 ARD방송국의 음악 프로그램 무지크라덴Musikladen에서 유럽의 음악 그룹 Top 10에 아바Abba, 듀란 듀란Duran Duran 등과 함께 선정될 정도로 코리아나의 인지도는 높았으나, 해외 소식이 잘 전해지지 않던 당시 사정을 생각하면 무리한 평가도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손에 손잡고'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었던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국내 유수의 음악 관계자들을 초청, 당시 쏟아져 나오던 국내 올림픽 관련 음악과 '손에 손잡고'를 비교 감상하는 공개 품평회를 열었고, 워낙 수준이 높았던 '손에 손잡고'에 음악 관계자들도 이 노래를 주제곡으로 사용하는데 찬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감동적인 멜로디와 코리아나의 힘있는 보컬이 돋보이는, 현재 들어도 가슴을 움직이는 명곡입니다. 냉전이 종식되던 당시 시대상과 빗대어도 감동적인 가사도 일품이죠.

 

지금은 JTBC 비정상회담에서 토론이 과열될 때마다 삽입곡으로 쓰이는 등 아직까지도 인기가 높은 노래입니다. 코리아나는 멤버 4명이 모두 가족관계에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죠. 이용규, 이애숙, 이승규, 홍화자. 이승규의 동생이 이용규, 이애숙이고, 홍화자는 이승규의 사촌형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승규의 딸은 현 시대에 유명한 연예인 클라라입니다.

 

아무튼 이 노래와, 이 공연은 서울 올림픽의 가치를 함축시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보이콧으로 인해 아쉬움을 남겼던 직전 3개 대회의 마스코트인 아미크, 미샤, 샘과 이번 대회 마스코트인 호돌이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강조하며 전 세계의 화합을 상징한점 때문인데요. 전 세계 평화의 시발점이었던 서울이 앞으로도 세계 평화의 중심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