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우리는 마음대로 살 수 있을까, 영화 명장
진가신 연출, 이연걸, 유덕화, 금성무 주연의 2007년작 명장을 보았습니다.
동양화를 보는 듯한 아름답고 깊은 프레임의 이미지가 묵묵히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변발 전문 배우(?) 이연걸 답게 청나라 말기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도 등장인물들이 변발을 하는데요. 그동안 여러매체를 통해 깔끔하게 빡빡 밀린 변발만 보다가, 머리를 다듬지 못해 밀어버린 부분이 약간 자란 변발을 보니 새삼 새롭습니다. 당연히 마치 머리가 자라지 않는 것 처럼 빡빡 민 변발만 생각했는데, 이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깨달음과 인물들이 처한 상황의 어려움을 자라난 머리칼을 통해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장철 감독, 강대위, 적룡 주연의 1973년작 자마(刺馬)의 리메이크격인 영화이기 때문에, 명장도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1870년 양력 8월 22일, '도적 경력이 있던 장문상이 의형제였던 양강총독 마신이를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마신이는 이날 상오 연병장에서 열병식을 마치고 총독부서로 돌아오던 도중 자객 장문상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고, 소식을 들은 서태후도 놀랄 큰 사건이라 반 년 남짓 수사를 진행했지만 암살 동기를 밝히지 못한채 장문상을 사형에 처합니다. 그리고 그 후 장문상의 심장은 도려내어져 마신이의 제단에 바쳐졌다고 합니다.
암살 동기도 밝혀지지 못하고 종결된, 역사에 짤막하게 기록된 이 사건은 후대에 여러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기반으로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가 탄생하게 되었는데요. 자마와 명장도 이 중 한 가지가 될 수 있겠습니다.
영화에선 장문상, 마신이 등의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살해당한 총독 마신이가 이연걸, 그를 살해한 장문상이 금성무 정도로 보셔도 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 난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장예모 감독 이연걸, 양조위, 장만옥, 견자단의 2002년작 영웅입니다.
뛰어난 영상미와 액션으로 유명한 영웅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중국식 이야기 전개가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었는데요.
반대로 명장에서는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려 하지만 결국엔 큰 흐름에 휩쓸려버리는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나있습니다.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과, 가족과 형제간의 의리의 충돌, 대의를 명분으로 자신의 출세를 추구하는 인간상이 서로 갈등을 빚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역사 속에 단 몇줄로 기록되듯, 파도가 휩쓸고간 모래 사장처럼 아무 의미도 없이 사라져버리죠.
요즘 시대 '개인'들은 각자 원하는 삶을 살거나,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닮고자 하는 롤모델을 찾아 그렇게 행동하고, 무한한 정보력을 가지고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죠. 거기에 '타고난' 성질과 신체조건과 머리까지. 개개인이 다 특별하고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개인이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삶을 사는지에 대해서요. 타고난 조건이 있는지에 대해서요.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 동물들도 배우지 않더라도 사랑을 하듯 본능적인 것이 아닐까요? 개개인이 각자 생각하는 방식도 다른 것도 구별점인데, 예를 들어 비판적 사고를 잘 하는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생겨먹었거나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발언을 하는 집안 환경, 혹은 비판적 사고를 했을 때의 (어려서 기억하지 못하는) 칭찬 경험 등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면 부모님 하는 것에 따라서 아이의 행동이 급작스레 180도 변하죠.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은 가족을 닮는다고 하구요. 내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모든 것,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 우리가 듣고 체험하고 맛보는 모든 것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행동하게 만들기도 하구요. 명장에서처럼 말입니다.
저는 그래서 '원래 그렇다', '나는 그렇다'는 말을 제쳐두고 근원적인 '나'에 대해서, 근원적으로 구별되는 내가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태초의 '나'를.
명장을 보면서, 아둥바둥 살고자 힘들여 노력하고 아파하고 죽어가는 모래알들을 휩쓸어 버리는 바다의 파도를 보면서, 다시금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씨네21, <명장>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것들 (2008.02.07)
씨네21, [진가신] "중국 시대극 중 단 한편도 사실적인 영화가 없었다" (2008.02.07)
덧붙여 이동진 평론가는 명장에 별점 6점을 주며 좋은 목적과 나쁜 수단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라는 한줄평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해묵은 논쟁은 썩지도 않고 닳지도 않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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