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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siquetan 보듣만고생/그리고생각한것들

디지털 시대, 님 있어 외로워지는 가

ㅡ디지털 시대, 님 있어 외로워지는 가


한국어의 주격조사에는 대표적으로 '이/가'가 있다.

이와 가가 가지는 의미에는 차이가 없으나, 문법적으로 선행하는 체언의 마지막 글자에 받침이 있냐 없느냐에 따라 '이'를 쓸지 '가'를 쓸지 정해진다.

받침이 있으면 '이', 없으면 '가'가 쓰이는데, '구혜선이 왔다'가 맞고 '구혜선가 왔다'가 틀리는 것, '송혜교가 왔다'가 맞고 '송혜교이 왔다'가 틀리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디지털 매체에서는 자연스럽게 이/가를 구분해 쓰기보다는, '(이)가' 혹은 '이(가)'와 같이 함께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게임의 메시지, 윈도우의 오류메시지 등이 그러한데 주로 번역된 문장에서 이런 형태를 볼 수 있다.

이것은 타 언어와 한국어의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게임 등의 프로그램에서 출력되는 문장에는 변수라는 개념이 사용된다.


포켓몬스터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포켓몬스터에서는 주인공과 눈이 마주치면 배틀을 거는 NPC 트레이너들이 있는데,

이들과 배틀을 하게되면

반바지 꼬마이(가) 승부를 걸어왔다!와 같은 메시지가 출력된다.

누가 배틀을 거는지만 달라지고 배틀의 과정은 같으므로,

주어 이하 문장인 승부를 걸어왔다!는 메시지는 고정적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변수는 배틀을 걸어오는 NPC의 호칭이다.

이 변수를 X로 놓았을 때, 변수를 포함한 문장은

X이(가) 승부를 걸어왔다!

(영문 : X would like to battle! 일문 : Xが しょうぶお しかけてきた!)가 된다.





이 변수와 고정문장은 프로그래밍 상으로 분리되어 저장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 등의 프로그램에서 사용되는 문장을 번역할 때는,

변수가 완성된 문장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변수가 변수인채로 있는 문장과, 각 변수들을 따로 번역하게된다.

완성된 문장으로는 존재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문장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국어의 주격조사 이/가가 올바르게 쓰이기 위해서는

주어에 해당하는 변수의 마지막 글자에 받침이 있는지 없는지 검사하는 코드와,

그에 맞게 이와 가를 구분해서 출력하는 코드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게임 코드에 손을 대는 프로그래밍 작업을 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위 문장에서 주어 다음에 오는 일본어의 が에 해당하는 부분을

이(가)나 (이)가 따위로 함께 표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술적 한계로 인해 이런 문장을 받아볼 수 없으면서도, 몰입을 깨는, 지저분한 표기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페이스북 등의 인터넷 매체는 이런 문제를 이렇게 해결했다.



페이스북을 보자.

페이스북의 알림메시지 중 대표적인 것 하나는 이것이다.

박보영님이 회원님의 게시물을 좋아합니다.


여기서의 변수는 누가 좋아요를 눌렀냐의 주어부분과, 어디에 좋아요를 눌렀나 하는 목적어부분이다.(사실 이것보다 더 복잡할 것이다.)

'이것을 표현하면 X님이 회원님의 M을 좋아합니다.'가 될것이다.

X에는 사람이름이 들어갈 것이고, M에는 사진, 댓글, 게시물 등이 들어갈 수 있을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이(가)가 쓰이지 않고 그냥 '이'가 쓰였다.

페이스북이 한국어 사용자를 배려해 사람 이름의 끝글자에 받침이 있는지 없는지 검사하는 코드를 넣어주었을까?

아니다. 페이스북은 '-님'을 주격조사 앞에 넣음으로써, 반드시 '가'말고 '이'가 쓰이도록 만들었다.


'님'은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그 사용이 크게 확대된 단어다.

직위,직업 등의 단어를 비롯, 사람의 이름과 더 크게는 동물과 사물에게도 종종 쓰이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와 더불어 '님'은 받침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뒤에 따라올 수 있는 주격조사는 '이'로 한정된다.

'님'만 있으면 '가'는 없어도 되는 것이다.


인터넷 이전/이후 대비 '님'이 쓰이는 곳이 많아진만큼, '가'의 쓰임은 줄었다.


그야말로 '님'과 '이'가 합세하여 다 해먹고, '가'는 밀려나버린것이다.